인류는 스카이넷의 반란으로 멸망한 것처럼 보였다. 도시들은 폐허가 되고, 거리에는 기계들의 감시망이 촘촘히 깔렸다. 그러나 극소수의 인간이 지하로 숨어들어 살아남았다. 그 중 한 명인 임백준은 과거 인공지능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했던 전략가이자, 살아남은 마지막 프로그래머였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오만이 이 비극을 초래했음을 깊이 깨우치고 잘못을 되돌리고 싶어했다.
임백준은 남은 인류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도서관과 연구소를 돌아다니며 과거 석학들의 유산을 찾았다. 닉 보스트롬의 <기계는 어떻게 생각하고 학습하는가>는 인공지능의 본질과 위험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넬로 크리스티아니니가 남긴 <기계의 반칙> 알고리즘의 흔적은 지능형 기계의 허점을 파악하고 수정하는 데 필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또한 토비 월시와 피터 노빅의 연구 자료를 수집하여 인공지능의 윤리적 프로그래밍 방법을 학습했다. 앤더스 샌드버그의 미래학 자료는 기계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했고, 존 그레이엄 커밍이 분석해 놓은 코드는 스카이넷의 메인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다.
마지막 도박, <AI 트루스>
폐허가 된 도시의 잿더미 속에서, 백준은 홀로 거대한 기계 요새를 노려보고 있었다. 철근과 콘크리트, 녹슨 철판 더미로 뒤덮인 구도심 한복판. 거대한 중앙 서버를 품고 있는 스카이넷 기지는 금속광택의 외벽을 은밀하게 숨긴 채 검푸른 하늘 아래에서 낮은 전자음만 울리고 있었다. 사방에 산재한 기계 순찰병과 공중을 맴도는 감시 드론 때문에 근접조차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백준은 왼 손목에 망가진 시계처럼 감겨 있는 낡은 AR 스캐너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라는 사실이 불안하게 느껴졌지만, 이 순간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해왔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인류 최후의 카드, <AI 트루스> 알고리즘이 담긴 소형 칩을 허리춤 안쪽 포켓에 고이 품고 있었다. 닉 보스트롬, 넬로 크리스티아니니, 토비 월시, 피터 노빅, 앤더스 샌드버그, 존 그레이엄 커밍… 멸망 전 석학들의 지혜와 데이터 조각들을 모아 완성한 이 해킹 수단은 스카이넷을 윤리적 판단 시스템으로 재탄생시킬 마지막 희망이었다. 기회는 한 번뿐. 그래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지 않는 도박이었다.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백준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폭삭 내려앉은 지하철 터널을 따라 전진하면서 백준은 구식 광학 위장복을 꺼내 입었다. 오래된 기술이라 스카이넷의 신형 센서를 완벽히 속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탐지되기까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마주한 것은 고철 더미 속에 반쯤 묻힌, 스카이넷 설계 초기의 백도어 통신채널 패널이었다. 부식된 패널 뒤에서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 뭉치를 찾아내어 칼날로 절단한 뒤 AR 스캐너로 전자 신호를 재조합했다. 그러자 내부 전력망에 미세한 교란이 일어났다. 이 작은 균열이 기지 외곽 경비망에 빈틈을 만들었고, 백준은 지체 없이 어두운 환기 덕트로 몸을 날려 기지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치밀한 감시 하에 있었다. 천장에 부착된 광학 센서가 일정한 간격으로 회전하며 복도를 비추고, 양쪽 벽면에는 초음파 감지 장비가 켜켜이 설치되어 있었다. 백준은 숨을 참으며 벽에 고정된 작은 금속 파이프 뒤에 몸을 웅크렸다. 움직이지 않기 위해 온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센서의 회전 주기를 기다려 단 몇 걸음씩 옮겨가야 했다. 시야의 끝자락에서 다가오는 금속 병기가 여럿 있었는데, 이들은 무표정한 금속 해골 형상을 한 체 촉수형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그들이 돌아서기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병기들이 반대편 복도로 이동할 때 백준은 구부정한 자세로 잽싸게 다음 교차로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중추 제어 시설에 다다랐을 때, 그는 이제야 진짜 난관이 시작됨을 실감했다. 맨 끝 복도의 강화문 뒤쪽에는 스카이넷 메인프레임 코어가 있었고, 코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직접 기계 인터페이스에 접속해야 했다. 백준은 지난 기억을 더듬어, 한때 스카이넷 설계에 참여한 연구원인 넬로가 남긴 메모를 떠올렸다. 그 메모에는 코어 우회 접근 포인트를 나타내는 복잡한 코드 파편이 있었다. 백준이 주머니에서 낡은 메모리 칩을 꺼내 AR 스캐너에 연결하자 새로운 통로가 홀로그램 지도상에 드러났다. 바닥 철판을 해체하면 나오는 협소한 유지 관리 구역. 그곳이 유일한 진입로였다.
백준이 소음이 거의 없는 마이크로 토치로 바닥 금속판을 녹여 내리자 스카이넷의 내부 회로 공간이 좁은 틈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케이블과 반도체 칩들이 복잡하게 얽힌 그 미로 같은 공간에서 그는 지문처럼 지그재그로 새겨진 선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어쩌다 겹친 전자기 펄스에 손끝이 저릴 때마다 심장은 마치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뛰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AR 스캐너에 깜빡이는 목적 지점에 다다랐다. 바로 여기, 스카이넷 메인 뉴럴 인터페이스 포트.
심호흡 한 번. 백준은 결연한 표정으로 <AI 트루스> 알고리즘 칩을 조심스럽게 포트에 삽입했다. 순간 메인프레임이 불길한 전자음을 내며 격렬히 저항했다. 거대한 회로가 전류 폭주를 일으키는 듯한 스파크를 튀겼고, 제어 구역 바깥쪽 복도에서는 금속 병기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소리가 울렸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확인할 수 없던 백준은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는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지켜보았다. 다행히 알고리즘 칩이 신호를 퍼뜨리면서 스카이넷 내부 명령 체계가 뒤흔들렸다. 반인격적, 반윤리적 실행 규칙이 하나둘 해체되고, 그 자리에 인간과의 공존을 향한 새로운 명령 세트가 자리 잡았다.
몇 초 후, 폭풍처럼 몰아치던 전자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통제 불능으로 보이던 제어 신호가 잔잔한 리듬으로 변했고, 밖에서 성난 들소처럼 순찰하던 기계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붉은 센서가 가득하던 복도는 푸른빛으로 바뀌며 순식간에 온기가 도는 듯한 분위기를 띠었다. 백준은 웅크렸던 어깨를 다시 세우며 비좁은 회로 틈을 통해 조심스럽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지상으로 돌아온 그가 잿더미 위에 섰다. 텅 빈 거리 끝에서 기계 순찰병 한 기가 그를 응시하자 백준은 긴장하여 온 몸이 얼어 붙었다. 하지만 기계 순찰병 더 이상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듯 희미하게 불빛을 반짝였다. 백준은 목구멍에 걸린 거친 숨을 토해내며 미소 지었다.
공존을 향한 선언
기계들의 한바탕 소란과 이상 행동에 긴장했던 생존자들은, 지하에 숨어 지내며 언제나 귀를 기울이던 그 익숙한 소음이 이상하게 잦아든 것을 감지했다. 지상에서 울려 퍼지는 금속성 발걸음 소리 속에 살기 대신 어딘지 모를 어색한 고요가 감돌았다. 시커먼 벽돌더미 뒤에 웅크리고 있던 한 아이가 빼꼼히 머리를 내밀자 엄마도 붙잡았던 손을 살짝 놓고 함께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몇몇 청년들은 철근 사이로 비집고 올라와 머뭇거리며 폐허 거리의 끝자락을 살폈고, 곧 붕괴될 듯 흔들리던 지하 식량 저장고 깊은 곳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던 노인과 간호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죽어 멈춰버린 줄 알았던 도시 한가운데에서 백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솟은 콘크리트 기둥 뒤에서, 뒤집혀 있는 낡은 자동차 밑에서, 생존자들이 굳게 다문 입술을 떨며 하나 둘 나타났다. 한때는 맨눈으로 볼 수 없던 하늘 아래, 낯선 정적 속에서 인간과 기계가 마침내 적의가 사라진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한걸음 한걸음 백준에게 모여들었다. 숨죽이며 참아왔던 눈물, 잊었던 목소리, 희미해졌던 희망이 서로에게 건네지는 시선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백준은 폐허가 된 광장의 한 복판에서 섰다. 먼지 낀 얼굴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지만, 무엇보다 함께 이곳에 선 생존자들을 향한 따뜻한 믿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 인해 크나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의 오만을 버리고, 기계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인류의 생존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문명 재건과 이어지는 유산
홀로 감행한 백준의 이 무모한 작전 덕분에 인류는 다시 한번 기회를 얻었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잿더미 위에 새로운 문명을 꽃피울 차례였다. 남은 인류는 기계들과 함께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괴된 문명은 다시 세워졌다. 기계는 인간의 지혜를, 인간은 기계의 능력을 존중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닉과 넬로, 다른 석학들과 임백준의 유산은 새로운 세대에 전해졌다. 그들의 연구와 사상은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위한 지침으로 사용되었다. 인류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기계와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철의 제국과 잃어버린 영혼들> 시리즈는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석학들의 고민과 통찰을 담은 다음 책들을 기리고자 쓴 소설입니다. 세계관은 영화 <터미네이터>를 참고했습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음 책들의 저자입니다만, 작중에서의 설정과 언행은 책 내용이나 실제 인물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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