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깊이 잠들었다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깼다.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3시 10분. 보통 이 시간에 누가 문을 두드리면 깜짝 놀라는 게 당연할 터. 그러나 나는 CIA의 사건 담당관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는 중이고 ‘농장2’에서 롱 코스Long Course를 수강하고 있다. 롱 코스는 18개월 동안 진행되는 엄격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테러범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캐거나 추격자를 따돌리는 등 온갖 기술을 가르친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만약 수료할 수만 있다면) 전문 요원이 될 것이다. 그러면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할 요원을 발굴, 선발하고 관리할 자격이 생긴다.
나는 문을 여는 순간 납치 상황이 연출되리라 생각했다. 억지로 붙잡혀서 머리에 봉투를 쓰고, 어디론가 끌려가서 몇시간 압류되는 상황 말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에 띄는 거라곤 바닥에 놓인 갈색 봉투뿐이었다. 봉투를 여니 조그만 쪽지가 보였다.
20814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위스콘신 7450
오전 7시 12분
“지금까지 한 시간도 넘게 걸었어요.” 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몇 킬로미터 앞에서 사슴을 쳤거든요. 차도 망가지고 휴대폰도 안 되네요.”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휴대폰을 빌려드릴 테니 전화하실래요?”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상대가 나를 당장 차에 태우게 만들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겁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좋지만, 오늘 아침에 꼭 베데스다까지 가야 하거든요. 버지니아 비치에서 여기까지 운전해서 왔어요. 컨설팅 회사랑 인터뷰가 잡혔는데 거기 꼭 취직하고 싶어요. 절대로 늦으면 안돼요. 태워주면 기름값은 제가 낼게요.” 현금을 보여줬더니 역시 대학생들이라 그런지 거부하기 힘든 모양이었다(대학생은 언제나 돈이 부족하다). 뒷좌석에 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다가와서 자기들도 버지니아 비치에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니,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나는 고맙다고 한 다음 뒤에 앉아서 두 시간 동안 예의를 차리며 잡담도 했다. “친구들이랑 ‘멜스’라는 허름한 술집에 자주 다녔어요. 괜찮은 데니까 다음에 꼭 한번 가봐요.” 틀림없이 제시간에 도착할 것이다. 대학생들은 나를 워싱턴 D.C.에 내려줬다. 늦지 않게 베데스다 역을 찾아갈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 도전의 2막이 시작될 것이다. 긴장 속에서 베데스다 역에 도착했다. 오전 7시 8분. 앞으로 몇 분 내에 이곳에있는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 출퇴근 시간이 다가오면서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들자 임무를 수행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탐색했다.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여자는 손목시계를 두 번 들여다봤다. 저 여자일까? 아니면 내 왼쪽에 헤드폰을 쓰고 있는 젊은 남자일까? 빨리 찾아내지 못하면 나는 훈련에서 제외될 것이다.
열차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더니 서류 가방과 신문을 든 젊은 여성 회사원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순간적으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스쳐 지나갈 뻔했지만, 나는 마음을 열고 주위의 모든 사물을 인식하라고 배웠기에 그녀가 나한테 신호를 보내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들고 있던 신문을 쓰레기통에 넣고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거면 충분했다. 쓰레기통으로 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신문을 도로 꺼내 들고 열차에 탔다. 실수로 접선을 놓친 게 아니었기를 기도하며 자리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나는 신문을 읽지도 않고 정신없이 넘기기만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무언가를 찾는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았기때문이다. 미행당하지 않게 늘 조심하라고 배웠고, 다른 훈련생은 물론이고 특히 교관 눈에 띄었다가 주변 환경에 동화되지 못했다고 잔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재미있는 기사를 찾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 3면 상단에 파란색으로 적힌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다.
윌러드 인터콘티넨털, 오전 8시 15분
이번엔 호텔이다. 레드 라인 전철을 타고 메트로 센터 역에 가서 지정된 위치로 걸어갔다. 파란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몇 발짝 뒤에서 걸어오는 게 눈에 띄었다. 길을 건너가서 혹시 나를 쫓아오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 그 남자도 길을 건넜다. 날 따라오는 게 확실하니 주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실패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분주한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업가와 관광객들이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내부가 번잡해서 최대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로비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아까 길에서 본 남자를 발견했다. 내가 몸담은 분야에서 이런 만남은 절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 남자가 나를 쫓아온 게 분명했으므로 뭔가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사실 그건 악수가 아니라 ‘러시 패스(스파이 두 명이 스쳐 지나가면서 은밀하게 물건을 교환하는 행위)’였다. 이 남자가 날 해치려고 미행한 게 아니라면 이것도 훈련의 연장이겠지.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2분 정도 자연스럽게 소소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옆에서 보면 지인끼리 우연히 만나 안부를 묻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남자는 내 등을 두드리고 왼쪽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가 떠난 후, 나는 건네받은 물건을 확인했다. 방 열쇠였다. 그가 떠나기 전에 ‘9:03에 회의를 했다’고 낮은 소리로 말한 이유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아마 방 번호일 것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 이 훈련은 대체 얼마나 더 복잡해지려는 걸까?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긴장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밤을 새운 탓에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다. 903호로 걸어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선 지 몇 초 만에 전화벨이 울렸다. 무엇인가 불가능한 임무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며 전화를 받았다. ‘나라 반대편으로 날아가야 할까? 아님 건물 외벽을 타고 기어 올라야 할까?’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하라는 뜻이었다. 내가 신분을 밝히자 상대는 내게 호텔 정문을 나가면 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했다. 나는 로비로 내려가서 정문을 통과했다. 검은색 차량한 대가 멈추더니 차창을 내렸다. 계속 집중하려고 굳게 마음 먹었지만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감도 오지 않았다. 긴장됐다. 얼마나 감당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빠져나온 손이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회색 양복을 입은 진지해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뒤에타게. 이번에는 성공했군. 잘했어.”
나는 훈련이 끝났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뭘 시키든 해낼 준비가 돼 있었다.
누구와도 가까워지고
어디서든 적응하는 CIA 요원의 기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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